[安經]당신은 정의를 위해 배신자가 될 수 있나?

 실험이라는 것이 그 종류가 다양하듯이 하루 종일 실험대 옆에서 실험기구를 들고 있어야 하는 한순간도 쉴 수 없는 실험이 있는가 반면, 실제 기구를 다루는 시간은 짧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은 실험이 있다. 요즘 끄적이는 자가 하는 실험이 후자에 속하는 실험이라 비록 주말에 집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실험실에 출근은 해야하지만 그래도 정신없이 바쁜 주말은 아니라서 시간과 싸우고자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덕분에 '安經'에 끄적일 거리도 생겼고 말이다.

 끄적이는 자는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예전부터 전쟁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곤 했다. 게다가 비디오 게임도 전쟁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총 쏘는 게임을 즐겨했고 지금도 즐기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만든 영화나 드라마는 즐기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소재가 거기서 거기인 우리나라 현실이라서 그럴까? 어쨌든 진짜 군대를 가지 않았다는 점과 더 큰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용감한 사람들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이 끄적이는 자로 하여금 전쟁 영화나 드라마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본 영화는 「킹덤 2 : 사막의 적」이라는 영화로 제목만 봤을 때는 세계 제2차 대전 중 아프리카 전선을 다룬 영화인가 추측했고, 포스터를 봤을 때는 영화 「킹덤」 후속편으로 사우디 아라비아가 배경이 되는가하고 추측했었다. 그러나 이번 「킹덤 2 : 사막의 적」은 「킹덤」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새로운 작품인 것은 영화를 보고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간단히 어떻게 관계가 없는 지를 살펴보자면 「킹덤」은 지리적 배경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던 반면, 「킹덤 2 : 사막의 적」은 이라크, 「킹덤」 주인공들은 미국 출신 FBI인 반면, 「킹덤 2 : 사막의 적」은 영국 출신 군인들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감독도 서로 다른 사람이었고...

 어쨌든 「킹덤 2 : 사막의 적」에 대한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주인공은 이라크에 파병된 아직 어린 영국 군인으로 어느 날 한 거리를 순찰하다 무장한 이라크 주민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교전 중에 전투 차량이 포탄에 맞아 주인공이 아닌 다른 어린 병사가 재조차 남지 않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일어난다. 이에 상부에서는 공격한 이라크 주민을 색출하여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우연하게 방에 권총 여러 자루와 망원경을 가진 청년과 제빵사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중년이 용의자로 체포하여 온다.

 상부에서는 용의자 심문은 따로 헌병대에서 하겠다고 호송만 맡기자 이전에도 죽어간 동료들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며 하사를 비롯한 병사들은 이전에 체포해온 이라크 주민들에게 성폭행 등 가혹한 고문을 한다. 파병 기간이 만료되어 다시 영국으로 귀환한 군인들, 그리고 주인공과 동료 군인들은 기쁘게 반겨주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간다. 주인공은 파병 기간동안 기다려준 여자친구에게 이라크에서 있었던 일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데, 그 고문에 대한 사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여자친구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주인공. 그리고 그 하룻밤 상대가 보낸 야한 사진이 문자로 온 것을 확인한 주인공 여자친구는 주인공을 신고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라크 주민을 고문한 사실이 밝혀지고 이와 관련한 모든 군인들이 군법 회의로 넘겨지고, 자신들 신변만 괜찮으면 된다는 상관들에 의해 주인공과 동료 군인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일단락 짓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주인공 동료 군인은 계속되는 심리적 불안에 의한 환각 증상을 일으키고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주인공 역시 좋은게 좋은 것이라고 자신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 사건을 무마시키려고 했으나 동료가 자살한 소식을 듣고 결국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어느 조직이나 구성원간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그 신뢰가 사라지는 순간 조직도 같이 무너지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자기 자신 안녕을 위해서 어쨌든 서로를 끝까지 신뢰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군대와 같이 생명을 담보로 하는 어느 조직보다 무한 신뢰가 필요로 하는 조직이거나 경찰, 검찰과 같이 일반인에 대한 법 집행을 하는 조직이라면 더욱 그것이 심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아무리 옳은 일을 한 것이고, 정의를 구현한 행동일지라도 내부 고발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배신자" 또는 "배반자"로서 낙인이 찍혀 어느 조직에서도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사회 역시 겉으로는 정의를 위하여 용기를 낸 사람이라고 칭찬을 할지언정 그가 다시 새로운 조직을 통해 사회로 돌아오는 것을 반기진 않는다. 여타 조직에서 받아들여주지 않는 그를 보호하기는 커녕 내버려두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며, 거의 방조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는가.

 조직이 추구하는 정의가 참된 정의인지 거짓된 정의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조직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조직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거짓된 정의도 참된 정의라고 믿고 행하는 것이고, 거짓된 정의를 거짓된 정의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조직이 무너지면 본인도 역시 다치게 된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사리사욕을 위해서 조직을 무너뜨린 사람을 "배신자" 또는 "배반자"라고하고 그에 따른 응징을 해야지, 보편적인 참된 정의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조직을 무너뜨린 사람도 그와 똑같이 대우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진짜 "배신자" 또는 "배반자"들은 조직이 무너져서 자신이 입을 피해는 없게끔 만들어 놓고 조직을 무너뜨리고 아무런 죄 없는 구성원들만 피해자를 만드는 반면에, 이번 영화 주인공과 같은 내부 고발자들은 끝까지 조직을 무너뜨리게 되면서 피해를 보는 본인 외에 다른 사람까지 생각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정말 참된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라면 이러한 내부 고발자들이 용기를 낸 만큼 다시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각 조직이 참된 정의가 자연스럽게 실현되게끔 유도를 해야한다. 과연 우리나라는 이런 점을 바탕으로 참된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일까? 말로만 "정의 구현 국가"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끄적이는 자는 이번 영화를 보면서 더욱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by 우비 | 2011/07/02 21:36 | 우비의 安經倉庫 | 트랙백 | 덧글(0)

[끄적임] 學生府君神位

 정말 오랜만에 끄적이는 자가 製作所에 와서 끄적임을 남기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적막함을 깨고 쓰는 끄적임 주제가 상당히 무거운 것은 주인도 찾지 않는 제작소를 꾸준히 찾아주신 분들께는 참으로 죄송하기가 그지 없다. 하긴 끄적이는 자가 제작소를 찾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다름아닌 140자로 내 뜻을 표현해야하는 소위 말하는 SNS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도 있겠지만, 역시 블로그만큼 마음놓고 편하게 끄적일 수 있는 공간은 없는 것 같아서 제작소는 개점휴업 상태로 내버려두고 있었는데... 어쨌든 제작소가 반갑고, 제작소를 찾아주신 여러분이 반가울 따름이다.

  요근래 "대학 등록금"이 뜨거운 감자다. 끄적이는 자 역시 4년제 대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자로 훌륭하신 부모님 덕택에 등록금은 한 번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6년 동안 내어 무사히 졸업을 마쳤다. 게다가 학력 인플레이션에 적극 동참하기 위하여(?) 스스로 번 돈을 모아 2년 동안 대학원 등록금도 꼬박꼬박 내어 수료를 하고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었고 하루 이틀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다. 매년 입학 때마다 각 학교 총학생회에서 신입생을 상대로 등록금 투쟁을 하겠다고, 삭발도 하고 집회도 하고 그랬었다. 하지만 학내에서 떠들어봐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학생들 자체도 와해되고 언론도 잠깐 들먹였다가 쉬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올해는 국민에게 인기를 잃으면서 위험성을 느낀 정치권에서, 그것도 대통령을 뒤에 두고 있는 여당에서 등록금을 언급했다. 솔직히 물가상승률에 편승하여 계속 오른 등록금도 문제지만 등록금 비율 중에 실제 학생들에게 직접 해당하는 수업료보다 기성회비라는 학교 운영을 위한 돈이 몇 십배가 많다는 사실은 누가봐도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등록금이 비싸다는 것은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비용이 비싸다는 것이 아니라 기성회비, 즉 학교 운영 비용이 비싸다는 것이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실질적 피해자이자인 학생들이 교내가 아닌 교외에서 집회를 열고 "등록금 반값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경찰에 연행도 되고 일부 학생은 집회 도중 쓰러졌는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등 좋지 않은 이야기가 들렸다. 

 이 끄적임은 SNS에서 이러한 집회가 "통닭좀비, 피자좀비", "물건값 깍아 달라고 떼쓰는 철없는 짓으로 보인다", "거리에 나온 것들은 학생 자격이 없는 놈들이다.", "김제동, 김여진 등과 같은 저렴한 인격과 나는 다른 것이다."라고 말한 모 인사에 대한 끄적이는 자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끄적인 것으로, 끄적이는 자는 아직 모든 것을 140자로 표현할 재주가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끄적이는 자도 대학 학부생 때 큰 시위에 기획부, 집행부로 활동하였었다. 물론 비싼 등록금을 선뜻 주시는 부모님께는 죄송하여 시위가 끝나고 다 정리가 되고 한참 뒤에야 솔직하게 말씀드렸지만, 선후배, 동기들을 단체 유급, 단체 제적까지 몰고 나가는 비장한 각오와 대규모 투쟁에 앞장섰었다. 

 대학본부에서 집행부에 대한 학교 명예 실추죄, 학생 선동죄 등등 죄목을 물어 무기 정학을 운운하며 기한 내에 학업에 복귀하라는 말도 들었었고, 결국 학업으로 복귀를 하며 사태는 일단락이 지어졌고 덕분에 언제 증축될지 몰랐던 수의학관, 비록 지금은 날림 공사, 부실 공사가 여실히 보이지만 어쨌든 세워졌었다. 한동안 대학본부 직원들 감시 눈초리도 받아야 했지만… 

 맞다. 학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해야할 일은 학업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부정할 수 없는 극명한 사실이다. 나이라고 해봐야, 사회경험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성세대가 활동하는 사회에 진출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햇병아리들이다. 이러한 학생들이 어찌하여 학내에서 그리고 학외에서 투쟁을 하게 되었는지는 생각해 본적이 없나? 

 명분만 논리에 타당하면 집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주체에 대해서 꼭 학생은 하지 마라는 법도 없고 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으니까, 학생도 필요하면 집회를 하고 투쟁을 할 수 있다. 물론 투쟁에 뛰어든 학생들 중에서는 단순히 기성 세대와 싸운다는 밑도 끝도 없는 반항감에 사로잡힌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기성 세대도 건드리지 못하는 기존 체제를 흔드는 투사 이미지가 멋있어서 반하여 동참한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옆에 동기들이, 선배들이 나가니까 나도 나가야 하나보다 하며 군중 심리에 휘둘린 불쌍한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친구들이 집회장소에 있는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어떤 집회든 투쟁이든 집행부, 즉 핵심인물은 단 몇 명이면 된다. 나머지는 전부 어떤 이유든 한 자리에 모인 성난 군중이면 된다. 오히려 핵심인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자체적으로 그 투쟁은 쉽게 와해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 성난 군중은 많으면 많을수록 언론에 보여주는 용도로, 핵심인물을 보호하는 용도로, 목소리를 보다 크게 낼 수 용도로 효과적이다. 어쨌든 그 집회장소에 있는 동안에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투쟁하는지, 시위하고 있는지, 집회를 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고 모였으니까 그들이 단지 어리고, 어리석은 젖냄새 풍기는 아이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정치권에서 논의가 되고 있고 언론에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게 언제 하루 이틀 일이었나? 이러다가 학생들도 방학이 되어 다 각자 취업을 위하여 영어학원을 가고, 실습을 나가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러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리는 일이 하루 이틀이었냐 말이다. 내가 투쟁했던 일 역시 학업에 복귀하는 순간 지역 신문에서도, 교보에서도 사라져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더라. 그게 지금까지 이 끄적이는 자가 보았던, 지금 집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보았던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학교 밖에서 떠들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논의는 오늘 못하면 내일도 할 수 있고, 올해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내년에 다시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단지 논의만 한다는 것을 당연히 등록금 반값 정책이 수립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중에 바보만이 하는 것이다. 지금 논의해야하는 것은 당장 등록금 반값으로 했을 경우 현 상태를 유지하는 재원이 있니 없니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명분이 타당성이 있냐 없냐를 정치권에서 논의해서 그것이 타당성이 있다고 여기면 이제 학생들이 싸울게 아니라 당신들이 싸워야한다는 것이다. 

 여론은 "있는" 자들을 위한 무기이자 방패이지, "없는" 자들 중에 하나인 학생들은 여론에 희생양이면 희생양이지 절대 여론을 무기나 방패로 사용하는 자는 아니다. 결국 지금 여론이 시끌시끌한 면을 비추고 있다고 한들 언제까지 학생들 쪽에서 비출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히려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이라면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성적이 떨어진다는 둥 하며 통계를 활용하여 그럴싸한 그래프를 보여주면서 공격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언론이 대세인냥 착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학생들을 본분인 학업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결국 기성 세대가 어떻게 결정하고 보여주느냐에 달려있다. 믿을 수 있는 것, 가시적인 것, 실현될 수 있는 것, 이 세 가지를 충족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지금 학생들은 더더욱 목소리가 커지고, 행동이 커지고, 점점 종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끄적이는 자 역시 투쟁을 했던 자로서 투쟁으로 얻은 것들에 대한 문제점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우려감을 전혀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높게 책정된 등록금이 문제가 있으므로 반값으로 낮춰야한다는 명분은 적극 지지하며, 따라서 가장 반값 등록금이 절실한 그들이 하는 이 행동에 대하여도 적극 지지하는 바이다. 배 고픈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예전에 한 번 배가 고팠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배가 고픈 사람이니까. 

 이번 투쟁을 기획했던 기획부, 집행부라고 불리는 곳에 있는 핵심인물들께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고하고 끄적임을 마치려고 한다. 

 만약 당신들이 현재 학생이라면, 이 끄적이는 자 후배들이라면 끝까지 자네들은 학생임을 망각하지 말고 학생으로서 지위와 체신, 본분을 항상 지켰으면 좋겠네.
 투쟁 방법은 기성 세대가 하는 방법을 똑같이 따라 할지언정 생각까지 따라 가면, 자네들을 믿고 따르는 선후배, 동기들을 배반하는 행위이며, 자멸하는 지름길로 가는 것이니까.
 그들이 가진 신임을 잃는 순간 자네들도 무너질 것이고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자네들을 구해주려고 손을 내밀지 않는다네.
 참 무섭고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게 사회라네. 힘내게!

by 우비 | 2011/06/05 20:13 | 우비의 短想 製作所 | 트랙백 | 덧글(1)

[視線]10.09.05




















 너무 많이 변했었다...
 그들이 나를 보면 똑같이,
 나도 많이 변했다고 그러겠지만...
 

 예전에 살던 집도,
 중학교와 학교 앞 거리, 학교 맞은편 동물병원도,
 있었던 것은 잠깐이지만,
 내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던 고등학교도...
 

 너무 많이 변했었다... 

 <11년만에 다시 찾은 울산에서...> 

- 끄적이는 자, 우비(woobi@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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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 2010/09/06 09:57 | 우비의 視線 | 트랙백 | 덧글(0)

[끄적임]실패, 거절, 인내란 단어를 모르는 세대

 하루가 머다하고 연일 좋지 않은 소식들만 TV 뉴스와 신문 등으로 접하고 있다. 굳이 이런 소식들이 아니라도 장마로 인하여 후덥지근한 날씨에 짜증도 나고 기분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말이다. 특히 이제 성추행, 성폭력, 성폭행은 사회 전반적으로 각계 각층에서 너무 많이 발생하여 특별한 뉴스거리도 안 되는 일상적으로 다가오려고 하고 있다. 그나마 지난 주말 신선하게 다가온 나쁜 소식은 인질극이었다. 

 여차저차 상세한 자초지종은 그 당사자가 아닌 이상 끄적이는 자가 알 수가 없겠지만, 여기저기 보도된 내용을 종합하자면 여자친구랑 결혼을 하고 싶은데 여자친구 어머니가 반대를 극심하게 하자 설득을 위하여 여자친구 집을 찾아갔고, 때마침 입구에서 여자친구 어머니와 맞딱들이자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제지하는 여자친구 어머니 팔꿈치를 준비해온 흉기로 찔렀고 동맥이 끊어져서 과다출혈 상태가 되었으나 여자친구와 함께 집 안에 감금하어 인질극을 벌였고, 결국 응급처치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여자친구 어머니는 과다 출혈로 사망, 여자친구는 계속 감금하다가 다음 날 새벽에서야 여자친구가 설득하여 자수하면서 사건은 종결되었다는 내용이다. 

 어쩌다가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끄적이는 자가 이 쪽 분야에 전문가가 아닌 이상 특별히 왈가왈부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요인 중에 하나로 요즘 세대들이 가진 전형적인 정신적·사회적 문제를 거론해보려고 한다. 물론 언급한 문제들만으로 요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설명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근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어쨌든 시작해보겠다. 

 우선 본격적인 끄적임에 앞서 미리 밝히는 부분은 끄적이는 자 역시 위 사건 장본인과 동일한 연령대이다는 것과 현재 10대부터 30대까지 연령대 중에서 형제, 자매가 없는 연령대에 속한 세대만이 해당되므로 끄적이는 자 본인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결과 끄적이는 자는 연령대는 동일하지만 해당되는 세대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해당되는 이 세대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살아오는 과정 내에서 자의적이든 또는 타의적이든 경쟁을 회피했다는 것이다. 그 경쟁 상대가 나랑 혈연 관계에 있는 사람이든 이름도 모르는 생면부지인 사람이든 말이다. 끄적이는 자가 짧은 생각으로 생각해 봤을 때는 자의적으로 경쟁을 피했다기 보다는 부모들이 일부러 경쟁을 피하도록 이끈게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왜? 내 아이는 그 누구보다 소중하니까. 내 아이가 경쟁 속에 내버려두면 피가 흐를 수도 있고 스트레스 속에 고통을 받을테니까. 그런 꼴은 죽어도 못 보니까. 

 덕분에 이 온실 속에서 자라온 세대들은 온실 속 환경을 사회 전체라고 여기고 살아가게 된다. 진짜 사회는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계속 부모들이 만들어준 온실 속에서 편하게 아무 걱정없이 자라다보니 알고 싶지도 않게 된다. 이 끄적임을 보고 있는 나와 당신은 이미 진짜 사회가 어떤 곳인지, 말로만 듣던 "무한 경쟁"이 어떤 것인지 이미 오래전에 직접 몸으로 체험했을 뿐만아니라 뼈 속에 깊게 새겨져 있는데 말이다. 

 1:1이든 1:다든, 중하든 사소하든 세상에 경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경쟁을 모르다 보니, 경쟁에 따르는 "실패", "거절", "인내"라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모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경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얻고 싶은 것보다 얻을 수 있는 것이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게다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것이 같기 때문에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 바로 경쟁 아닌가. 

 결국 내가 경쟁에서 승리하여 얻고자 하는 것을 내 손에 획득했다면, 나와 경쟁 상대였던 다른 누군가는 경쟁에서 "실패"하여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내가 경쟁에서 "실패"하여 얻고자 하는 것을 내 손에 넣지 못한다면, 나와 경쟁 상대였던 다른 누군가는 내가 그렇게 원했던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싫든 좋든 어쨌든 경쟁이 시작되면 언젠가는 끝나게 되고, 그러면 필연적인 결과로써 승리와 패배,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게 된다.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며 내가 인정하기 싫다고 해서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는 없다. 나 혼자만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일 뿐. 

 또한 경쟁을 통해서 힘겹게 내가 노력하여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본 적이 없는 이 세대는 항상 원하면 원하는대로 족족 그 누군가가 장만하여 거저 주었기 때문에 받는 승낙에만 익숙하지 "거절"을 당해본 것은 익숙하지 않다. 실제 세상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전부다 이루어지는 마법 램프 또는 마법 양탄자가 아니다. 게다가 평생 내 옆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공짜로 챙겨주는 그런 사람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번 인질극이 "거절"에 대한 너무 경험을 많이 하여서 더이상 "거절"에 대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에 대한 표출에 의해서 발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익숙한 것에 대하여 크게 반하여 강력한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크게 반하여 강력한 행동을 하는 빈도가 훨씬 높지 않을까? 익숙하지 않다는 것 자체가 강력한 행동을 유발하는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는가.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아닌 누군가가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절"에 대한 경험을 조금이라도 경험했었더라면, 아무리 여자친구 어머니가 둘 사이 결혼을 반대한다고 해도 보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고 대응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거절"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내가 원했던 것은 주변에서 얻게 해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익숙한 사람보다 더욱 큰 박탈감을 안겨줄 것이고 당황할 것이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경쟁이 항상 단시간에 끝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 이틀 또는 한 주, 한 달, 또는 1년, 그 이상 또는 평생동안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에서 빠져나오는 기간 동안 참아야하는 "인내"는 결국 경쟁에 뛰어들지 않은 세대는 도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러한 "인내"는 책이나 영상 등으로 간접적으로 체험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성격도 아니며, 결국은 스스로 직접 체험하고 느껴야만하는 것이다. 

 옛말에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도 있다. 칼을 휘두르고, 과다출혈로 죽이려고, 여자친구 어머니만 만나러 여자친구 집에 찾아간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결과는 이미 일어났고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사실이다. 여자친구 집에 찾아가면서 칼을 품 안에 챙겨서 간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지만, 그 당시 자신이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막는 여자친구 어머니에게 꼭 칼을 휘둘렀어야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때 세 번, 아니 한 번만 더 참았더라면 여자친구 어머니도 아직 살아있을 것이고, 여자친구를 감금하고 인질극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며, 자수하고 구속 영장을 받아서 판결을 기다리는 범법자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끄적이는 자가 맡고 있는 자리가 있어 올해 새로 들어온 후배들을 살펴보아도 "인내"는 상당히 거리가 먼 단어라고 느껴졌었다. 남보다 항상 더 빨리를 외치는 사회이다보니 느림, 느려짐은 죄악으로 여겨지고 나에게는 없어져야할 단어라고 여기겠지만, 기다림은 결코 느림, 느려짐은 아니다는 것까지 억지로 잊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쨌든 끄적이는 자는 이번 인질극이 과연 그 당사자 본인에게만 잘못이 있냐는 질문을 끝으로 하고 싶다. 물론 개개인 스스로 가진 정신적인 문제에 대하여 잘못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약 개개인이 가진 정신적인 문제를 주변에서 알고, 같이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이 있었더라면 그 부분만큼은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은 이번 인질극은 당사자인 그에게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준 그를 낳고 기른 부모, 그리고 그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지 않을까... 

 많은 위인들은 "실패", "거절", "인내"에 대하여 자조적인 위치에서 바라보고 충분히 인정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였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는 명언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명언도 그냥 그런 글자 몇 자로 배우고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도 모른체 그저 외우는데 급급한 우리 교육 환경도 이번 사건에 대한 공범이 아닐 수 없다. 

- 끄적이는 자, 우비(woobi@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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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 2010/07/27 17:24 | 우비의 短想 製作所 | 트랙백 | 덧글(0)

[安經]법의, 법에 의한, 법을 위한...

 우리가 사는 현실은 교과서에서 보고, 배운 것처럼 모두가 평등하지도 않고 기회가 고르게 주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미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실이다. 특히 자본주의를 경제적 이념으로 삼은 대부분 현대국가에서는 특히, 재산의 부유함 정도에 따라 그 평등성의 불공평함이 더 커진다는 사실도 말이다. 우리가 배운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라는 것은 결국 모든 이들이 원하는, 아니 절대적 또는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해 여러가지를 박탈당하고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들이 원하는 이상향일 뿐일까? 비록 우리는 그 법에 의해 보호받고 구속되는 법치국가에 살고 있지만 말이다.

 절대적으로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든 상대적으로 가지고 그렇지 못한 자든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소유욕은 인간의 본성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결국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아 가질 수 없는 "재산" 대신에 "권력"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바로 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 현실에서도 실질적으로 통용이 된다면 왜 그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왔으며, 여전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서민들은 그 수가 줄어들지 않는것일까? 사회의 전반적으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 대한 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는 것은 현실이며, 이는 곧 법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예전의 신분 사회에서 보이던 그러한 계급은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사회에서 신분에 따른 차별은 남아있고 이름과 모습만 바뀌었을 뿐 계급은 존재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로 여기고 싶지 않아 억지로 인정하고 인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에서 나오는 차별과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되는 신분·계급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각자 나름대로 끊임없이 경쟁하고 투쟁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고 우리 사회이다. 물론 비단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든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한 그 모습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변하지 못할 것이다.

 생존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우위선점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면 그만큼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말이다. 이는 단지 사회에서 신분, 계급을 떠나서 자연에서 높은 곳에 있는 피식자가 낮은 곳에 있는 포식자를 잡아먹기 쉽다는 점에서도 높낮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가진 자들의 세계든 그렇지 못한 자들의 세계든 구분 없이 평등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도 있으니까. 아무리 인성과 사고가 있는 인간들의 사회에서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약육강식의 피비린내가 아니겠는가.

 이번 '安經'에서 소개하려는 작품은 원제가 「Felon」으로 우리나라에는 개봉되지 않았지만 2008년도에 미국에서 개봉되었고, 릭 로만 워프가 감독을 발 킬머와 스티븐 도프라는 배우가 연기를 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봉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우연한 기회에 '지인'과 함께 볼 수 있는 자리가 있어서 접하게 되었다.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장래를 촉망받고 곧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식을 올릴 한 건축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집에 침입한 도둑을 쫓다 그만 자기 집 마당에서 한 번의 방방이질이 도둑을 죽이고 말았다. 물건을 훔치러 들어온 도둑이지만 훔쳐간 물건이 없고 집 안이 아니라 마당이므로 집 밖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결국 살인죄가 성립, 법정에서 구속형을 당하게 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을 들었을 법한 건축가가 이제는 법의 보호가 아닌 법의 구속을 받고 있는 한 살인자로 하루 아침에 바뀌는 순간이다.

 법의 구속이라는 울타리 내에 이쓸 것이라고 상상하는 교도소는 아이러니하게도 법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곳이며, 법은 오직 울타리를 감시하고 있는 간수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버이 있든 없든 그곳만의 생존규칙에 하루빨리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고, 적응하였다면 남들보다 우위에 서야만 한다. 그 규칙이 비록 남에 의해 만들어지고 따라가야 하는 것이든 아니면 내가 만들고 다른 사람이 따르게 해야하는 것이든 말이다.

 하지만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항상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언제든지 수시 때때로 쉽게 그 자리가 바뀌기 마련이다. 오늘의 수혜자가 내일은 박해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아직 사회가 살만한 것은 그래도 이러한 여러 본능의 유혹을 끝까지 이성으로 꽉 부여잡고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나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정의의 수호를 위해서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인공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뒤를 계속 봐주며 마지막에 목숨까지 희생하며 지켜주고 도와준 죄수 선배의 도움과 그래도 아직 사회의 정의 실현이 자신의 사리사욕 충족보다 더 지켜야할 가치라고 생각하는 때 묻지 않은 신입 간수의 협조로 법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하지만 지금껏 그러지 못하였던 무법천지의 교도소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 다시 자유를 찾게 된다.

 이번 영화는 끄적이는 자에게 이미 몸으로 깨달아버린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주었고, 다른 한 가지가 강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그 한 가지 시실은 과연 법은 아직도 만인게게 평등한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법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법 위에 있는 자와 아래에 있는 자, 법과 친한 자와 친하지 않은 자 등등에 따라서 법은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른 한 가지 강한 질문은 법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것인가라는 것이다. 법이라는 것은 언제 어떤 전후상황이든 그 때 일어난 사실과 결과에 대해서 티끌만큼도 변함없이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겠지만, 비록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서 또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해서는 그 처음 목적과 의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기회는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법이 사람이 아니라 또 다른 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지는 살펴봐야겠다는 점은 끄적이는 자가 이번 '安經'을 끄적이면서 갑자기 드는 생각이다. 법은 사람이 만들었고,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사람에 의해 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의 목적이 사라지고 망각하여 어 법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지고, 존재하고, 집행이 된다면 그 법은 더이상 법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일까 어기지 마라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끄적이는 자가 끄적임을 읽고 있는 여러분께 드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품 속에서 주인공을 끝까지 지켜주는 죄인 선배로 나온 발 킬머의 대사로 마치고자 한다.
 "When your life is defined by a single action, you change the concept of time."
 (단 한 번의 행동에 의해 너의 인생이 정해진다면, 너는 시간의 개념을 바꾼다.)

- 끄적이는 자, 우비(woobi@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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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 2009/11/02 14:39 | 우비의 安經倉庫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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