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經]법의, 법에 의한, 법을 위한...

 우리가 사는 현실은 교과서에서 보고, 배운 것처럼 모두가 평등하지도 않고 기회가 고르게 주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미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실이다. 특히 자본주의를 경제적 이념으로 삼은 대부분 현대국가에서는 특히, 재산의 부유함 정도에 따라 그 평등성의 불공평함이 더 커진다는 사실도 말이다. 우리가 배운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라는 것은 결국 모든 이들이 원하는, 아니 절대적 또는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해 여러가지를 박탈당하고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들이 원하는 이상향일 뿐일까? 비록 우리는 그 법에 의해 보호받고 구속되는 법치국가에 살고 있지만 말이다.

 절대적으로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든 상대적으로 가지고 그렇지 못한 자든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소유욕은 인간의 본성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결국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아 가질 수 없는 "재산" 대신에 "권력"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바로 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 현실에서도 실질적으로 통용이 된다면 왜 그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왔으며, 여전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서민들은 그 수가 줄어들지 않는것일까? 사회의 전반적으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 대한 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는 것은 현실이며, 이는 곧 법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예전의 신분 사회에서 보이던 그러한 계급은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사회에서 신분에 따른 차별은 남아있고 이름과 모습만 바뀌었을 뿐 계급은 존재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로 여기고 싶지 않아 억지로 인정하고 인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에서 나오는 차별과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되는 신분·계급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각자 나름대로 끊임없이 경쟁하고 투쟁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고 우리 사회이다. 물론 비단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든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한 그 모습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변하지 못할 것이다.

 생존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우위선점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면 그만큼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말이다. 이는 단지 사회에서 신분, 계급을 떠나서 자연에서 높은 곳에 있는 피식자가 낮은 곳에 있는 포식자를 잡아먹기 쉽다는 점에서도 높낮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가진 자들의 세계든 그렇지 못한 자들의 세계든 구분 없이 평등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도 있으니까. 아무리 인성과 사고가 있는 인간들의 사회에서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약육강식의 피비린내가 아니겠는가.

 이번 '安經'에서 소개하려는 작품은 원제가 「Felon」으로 우리나라에는 개봉되지 않았지만 2008년도에 미국에서 개봉되었고, 릭 로만 워프가 감독을 발 킬머와 스티븐 도프라는 배우가 연기를 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봉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우연한 기회에 '지인'과 함께 볼 수 있는 자리가 있어서 접하게 되었다.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장래를 촉망받고 곧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식을 올릴 한 건축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집에 침입한 도둑을 쫓다 그만 자기 집 마당에서 한 번의 방방이질이 도둑을 죽이고 말았다. 물건을 훔치러 들어온 도둑이지만 훔쳐간 물건이 없고 집 안이 아니라 마당이므로 집 밖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결국 살인죄가 성립, 법정에서 구속형을 당하게 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을 들었을 법한 건축가가 이제는 법의 보호가 아닌 법의 구속을 받고 있는 한 살인자로 하루 아침에 바뀌는 순간이다.

 법의 구속이라는 울타리 내에 이쓸 것이라고 상상하는 교도소는 아이러니하게도 법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곳이며, 법은 오직 울타리를 감시하고 있는 간수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버이 있든 없든 그곳만의 생존규칙에 하루빨리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고, 적응하였다면 남들보다 우위에 서야만 한다. 그 규칙이 비록 남에 의해 만들어지고 따라가야 하는 것이든 아니면 내가 만들고 다른 사람이 따르게 해야하는 것이든 말이다.

 하지만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항상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언제든지 수시 때때로 쉽게 그 자리가 바뀌기 마련이다. 오늘의 수혜자가 내일은 박해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아직 사회가 살만한 것은 그래도 이러한 여러 본능의 유혹을 끝까지 이성으로 꽉 부여잡고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나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정의의 수호를 위해서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인공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뒤를 계속 봐주며 마지막에 목숨까지 희생하며 지켜주고 도와준 죄수 선배의 도움과 그래도 아직 사회의 정의 실현이 자신의 사리사욕 충족보다 더 지켜야할 가치라고 생각하는 때 묻지 않은 신입 간수의 협조로 법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하지만 지금껏 그러지 못하였던 무법천지의 교도소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 다시 자유를 찾게 된다.

 이번 영화는 끄적이는 자에게 이미 몸으로 깨달아버린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주었고, 다른 한 가지가 강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그 한 가지 시실은 과연 법은 아직도 만인게게 평등한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법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법 위에 있는 자와 아래에 있는 자, 법과 친한 자와 친하지 않은 자 등등에 따라서 법은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른 한 가지 강한 질문은 법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것인가라는 것이다. 법이라는 것은 언제 어떤 전후상황이든 그 때 일어난 사실과 결과에 대해서 티끌만큼도 변함없이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겠지만, 비록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서 또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해서는 그 처음 목적과 의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기회는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법이 사람이 아니라 또 다른 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지는 살펴봐야겠다는 점은 끄적이는 자가 이번 '安經'을 끄적이면서 갑자기 드는 생각이다. 법은 사람이 만들었고,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사람에 의해 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의 목적이 사라지고 망각하여 어 법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지고, 존재하고, 집행이 된다면 그 법은 더이상 법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일까 어기지 마라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끄적이는 자가 끄적임을 읽고 있는 여러분께 드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품 속에서 주인공을 끝까지 지켜주는 죄인 선배로 나온 발 킬머의 대사로 마치고자 한다.
 "When your life is defined by a single action, you change the concept of time."
 (단 한 번의 행동에 의해 너의 인생이 정해진다면, 너는 시간의 개념을 바꾼다.)

- 끄적이는 자, 우비(woobi@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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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 2009/11/02 14:39 | 우비의 安經倉庫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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