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2월 23일
[安經]'죽음' 여사가 사랑에 빠지면...
이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예술 작품의 가장 많이 다룬 소재를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활자매체로 된 작품이든 물감으로 색칠된 작품이든 말이다. 특히 사랑 중에서도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나 동성친구간의 사랑, 형제자매간의 사랑보다는 역시 남녀간의 사랑이 그 비율이 월등히 높지 않을까?
비록 끄적이는 자가 사회학 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문외한이긴 하지만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한 번도 끊임없이 인류와 함께 해왔고, 지금도 해오고 있고, 미래에도 해 갈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별, 나이, 인종, 사회적 배경 등등 인류를 구분하는 모든 것들을 떠나서 생물학적으로 사람이라면 모두다 가지고 있는 감정이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너무 지나치게 끄적이는 자의 개인적인 짧은 생각이려나?
그 다음으로 많이 다룬 소재를 꼽으라고 한다면 "죽음" 아니면 "탄생"이 아닐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끄적이는 자는 "죽음"이 "탄생"보다 그 비율이 조금 더 높지 않나 생각한다. 둘 다 사람들에게는 경외로운 현상이지만 "죽음"은 "탄생"이 가지지 못한 경외로움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공포의 위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이번 '安經'에서 소개할 작품은 지난 작품인 『눈먼자들의 도시』로 끄적이는 자의 좋아하는 작가 목록에 등극한 주제 사라마구의 신작으로 가장 흔한 소재인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다룬 『죽음의 중지』라는 작품이다. 원제는 『As intermitencias da morte』로 영제는 『Death with interuptions』로 직역을 하면 '방해받은 죽음' 정도 해석이 될 것 같다.
작가의 지난 작품을 읽어본 독자는 알겠지만 이번 작품 역시 흔한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등장인물간의 대화를 따옴표로 분리해놓거나 문단을 나누어 분리를 하는 등의 구성은 찾아볼 수가 없다. 끄적이는 자도 작가의 지난 작품을 읽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처음은 약간 불편한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지난 작품에서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이번 작품이 처음인 독자라면 상당히 답답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문장 하나마다 줄이 바뀌는 것을 따라가면서 흐름이 뚝뚝 끊김을 느끼는 것보다는 줄줄 이어지는 대화가 흐름을 따라가기에는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소설 구성에 있어서도 전지적 작가 시점과 1인칭 관찰자 시점을 동시에 사용하여 과연 등장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끔 되어 있다. 작품의 서두인 3분의 1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하여 죽음이 '중지'된 현실을 설명한다. 단순히 '죽음'만 없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작가는 설명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 이야기'나 「나라야마 부시코」의 이야기도 나온다.
어느날 이후부터 아무도 죽지 않는 것이 과연 축복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일러준다. 물론 죽음의 중지가 진시황이 그렇게 염원했던 '불로장생'이라면 모르겠으나 사고가 나서 피가 흐르고, 암에 의한 고통의 연속인 나날들을 보내고, 나이는 계속 한 해가 지남과 동시에 한 살씩 먹음에도 불구하고 죽지만 않는다면... 과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중반의 3분의 1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다시 어느날 보라색 편지 한 통과 함께 다시 시작된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을 작가는 독자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사람의 죽음을 관여하는 것이 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한 것이라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만약 그러한 존재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데, 단어에 성별이 나눠지는 대부분 국어에서 '죽음'은 여자라는 것에 착안하여 작가 나름대로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독자들이 마음에 들지 안 들지는 결국 독자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시 죽음이 재개되면서 '죽음' 여사가 보낸 '사형 선고' 편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과연 죽기 전 1주일의 유예기간을 주면 당신은 어떻게 보낼 것인가라는 질문도 던진다.
마지막 3분의 1은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앞서 이야기 했던 '죽음'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그녀와 평생을 같이한 하얀색 낫과 말이다. 여느날과 같이 '사형선고'와 함께 1주일의 유예기간을 주다가 반송되는 편지를 받게 되면서 뭔가 잘못됨을 느끼면서 그 이유를 직접 찾아서 해결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유를 해결하러 나간 이후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는다.'의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한 작품은 제일 마지막 다시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는다.'의 하나의 문장으로 끝을 맺는데, 독자로 하여금 끝부분에서 다시 처음부분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게하는 기법을 씀으로써 끄적이는 자는 작가가 윤회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물론 끊임없는 죽음의 영속성을 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니 지금 끄적이는 자 마음이 그 쪽을 향하고 있어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더 위대한 것을 꼽으라면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드는 것은 왜일까? '죽음' 여사의 '사형선고'를 막은 것도 사랑이니까 말이다. 한 가지 무서운 점은 자신의 본분을 잊게하는 사랑의 힘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솔직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아무나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쨌든 흔하다고 생각한 소재를 색다르게 표현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에 칭찬을 마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끝으로 작품 속에 나오는 문구들을 소개하며 이번 '安經'을 줄이고자 한다.
'Sauve qui peut.(자신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라.)'
'Memento, homo, quia pulvis es et in pulverem reverteris.(인간이여, 너는 흙이며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
- 끄적이는 자, 우비(woobi@hanmail.net) -
# by | 2009/02/23 18:36 | 우비의 安經倉庫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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